Page 42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P. 42

문이  중요시되던  청대
                                                    불교에  중요한  문헌이
                                                    다. 금릉각경처의 최초

                                                    간행 도서가 『정토사경』

                                                    이었다는  사실에서  금
                                                    릉각경처  발기인의  신
                                                    앙  경향이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에서  벗어

                                                    나지 않았고, 기존 청대
         사진 2. 『대승기신론소』 권하(1877).
                                                    불교의 큰 흐름 속에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금릉각경처의 불서 출판 방식은 여러 판본을 수집해서 교감과 대조를 통

          해서 정본定本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판각한 후 인출하는 방식이었다. 형
          식은 전통적인 방책본方冊本으로 만들어 유통하였다. 양문회가 설립한 금릉
          각경처를 특히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이곳에서 기존 불교 문헌에 대한 정

          본화 작업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산실散失된 많은 문헌들을 다시 간행했다

          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당말唐末 이후 전란 등의 원인으로 몇몇 종파
          의 문헌을 제외하고는 불교 경전과 주석서들이 흩어져 사라진 게 많았다.
           양문회는 일본에 전래된 중국 찬술 문헌에 관심을 기울였다. 양문회가

          일본에서 중국 찬술 문헌을 구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영국 체류 중에 교

          류한 난조분유南條文雄(1849~1927)의 도움이 컸다. 양문회는 1878년 청정부
          가 파견한 유럽 주재 흠차대신欽差大臣 증기택曾紀澤(1839~1890)을 수행해서
          유럽을 방문했다. 1882년까지 프랑스와 영국에 장기간 체류했다. 1879년

          초 영국 런던에 도착해 난조분유를 만났다.



          40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