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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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 불렸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 속해 있지만, 고려 초
기부터는 길주吉州라고 하다가 명종明宗(1545~1567) 이후에는 안동도호부安
東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면서 일본식민지시기까지도
봉화현奉化縣에 속했다. 1407년 태종 7년에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선생이 전국의 사찰들 중 주요 사찰 지정을 왕에게 요청하며
태자사를 그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태자사는 중요한 가람이
었던 것 같다.
이 태자사에 그 유명한 「낭공대사탑비朗空大師碑」가 서 있었다. 기울어져
가던 신라에서 법을 펼치며 굴산선문崛山禪門의 불꽃을 크게 일으킨 낭공
대사 행적行寂(832~916, 도당유학: 870~885) 화상을 찾아 나선 발걸음이 마
지막에 여기에 다다랐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태자사는 없고 동네의 이
름에만 그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太子里가 그
곳이다.
‘태자리’나 ‘태자산’이나 그 이름에는 신라가 망하고 경순왕의 맏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태자사가 있었던 곳에는 폐교된 태자초등학교의 텅 빈 건물
만 남아 있다. 사역에는 그 옛날 태자사에 있었던 어느 고승의 탑비에서 남
은 귀부와 이수만 부근에 나뒹굴다가 수습되어 민가 옆에 있는데, 그 모습
이 애처롭기만 하다.
행적화상 낭공대사의 행적
행적화상의 일대기는 최인연崔仁渷(=崔愼之=崔彦撝, 868~944) 선생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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