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P. 99
다. 그런 후에 지금의 춘천인 삭주朔州에 있는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주석하
며 띠집을 고쳐 산문을 여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진
성여왕 시대를 거치면서 곳곳에 일어난 반란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암곡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경주에 머물기도 하다가 삭주로 돌아오곤 했다. 건
녕乾寧(894~897) 초기에는 왕성에 머물렀고, 광화光化(898~900) 말에는 야
군野郡으로 돌아갔다.
효공왕孝恭王(897~912)은 선종禪宗을 중시하여 승정僧正인 법현法賢 화상
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초빙하였는데, 906년에 제자 행겸行謙, 수안邃安,
신종信宗, 양규讓規 화상 등과 함께 왕경으로 가서 법문을 하니 왕은 그를
국사國師의 예로 대우하였다. 신덕왕神德王(912~917)도 그를 국사로 삼고
915년에 남산에 있는 실제사實際寺에 주석하게 했다. 실제사는 진흥왕眞興
王(540~576) 22년인 566년에 창건되었는데, 신덕왕이 왕자로 있을 때 선방
으로 사용한 적이 있어 이를 행적선사에게 주어 주석하도록 하고 왕도 법
문을 듣고는 했다. 이처럼 낭공대사는 효공왕과 신덕왕에 이러 양조국사
兩朝國師로 존숭되었다.
그 후 신라 명문 집안의 여제자인 명요부인明瑤夫人이 자신이 마련한 석
남산사石南山寺로 가서 주지를 맡아 줄 것을 청하여 이를 허락하고 산과 계
곡으로 둘러싸인 그곳으로 가서 주석하다가 916년에 85세로 입적하니 승
납 61세였다. 석남산의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모셨다가 3년째인 918년 11
월에 정식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 석남산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하
지 않다. 언양 석남사인지 아니면 경주와 가까운 다른 곳인지, 아니면 태
자사를 말하는 것인지 등등 여러 의문점이 있다.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