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2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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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것이다. 새로운 범
본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
고, 가르쳐 줄 교사도 없
었고, 인도 유학과 티베
트행이 좌절되었다.
일련의 상황들은 난죠
에게 일본불교가 인도불
사진 6. 『인도기행』.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디지털자료. 교처럼 쇠퇴의 길을 걸어
서는 안 된다는 점과 일본불교를 융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했다.
이 점이 난죠가 귀국 후 범어 연구보다 포교와 교육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귀국 후 난죠의 행보는 먼저 나고야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보통학
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888년(40세) 문부성으로부터 문학박사학위를 일본
에서는 처음으로 받았다. 1901년, 오타니대학의 교수로 취임해서 일본 내
근대적 불교연구를 위한 교육기관 창설에 주력하였다.
1903년 키요자와 만시清沢満之의 뒤를 이어 오타니대학 제2대 학감에 취
임(~1911년)했고, 1914년부터 1923년까지 18년간 오타니대학 총장으로 재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진종 오타니파의 학사체제를 정비하고 불교학과
동양학계의 근대적 불교교육과 보급에 힘썼다. 학계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집필활동을 계속해 일본불교의 대중화
에 앞장섰다.
티베트에서 불전을 수집하고자 했던 난죠의 계획은 멈췄지만 강단에서
산스크리트와 티베트 불전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후학들에게 티베트
탐험의 중요성을 일깨워 난죠의 영향을 받은 노우미 유타카能海寛(1868~1903)
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1866~1945) 등이 티베트를 방문해 불전을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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