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7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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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1947)는 난죠의 추도식에서 이 시기의 난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도
했다.
“참으로 유감인 것은 선생님의 연구가 영국 유학 기간에 절정에 달
해, 귀국 후에는 그 이상의 전진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일상은
범어 연구보다도 포교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포교로 선생님을 몰
아대는 본산도 본산이었지만, 그것을 시키는 대로 다 응했던 선생
님도 선생님이셨다고 나는 생각했다.”
난죠의 포교활동은 인도 기행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야마베 슈가쿠山辺
習学(1882~1944)는 “40세 이후 약 35년간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사이도 없이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하루 수 시간을 강단에 섰고, 등
과 발이 땀에 흥건히 젖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당시의 난죠를 회상했다.
난죠가 영국 유학 전부터 진종 본산 사무소의 교육과에서 근무했다지만
영국 유학을 통해 ‘연구’에 발을 들인 그가 다시 ‘포교와 교육’으로 전환한 데
에는 인도 기행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인도에 대한 동경
난죠가 인도의 불적佛蹟을 방문해 참배하고 싶다는 동경은 영국 유학을
떠날 때부터 있었다. 그는 함께 유학을 떠났던 가사하라 켄지笠原研寿와 함
께 영국에 가기 전 인도에 들려 불적을 참배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
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시 두 사람은 귀국 시 인도에 들려 석가의 유적
지에 참예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가사하라가 병으로 먼저 귀국하고,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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