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8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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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 역시 친부의 사망과 양모의 병환 때문에
인도가 아닌 보다 빠른 미국을 경유한 루트
로 귀국했다. 따라서 인도는 난죠에게 있어
여전히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귀국 후 난죠는 포교와 더불어 『영지회
잡지令知會雜誌』에 인도와 관련한 저작물들
을 적극적으로 발표했다. 모두 타인의 저
사진 2. 『영지회잡지令知會雜誌』.
작물들로 난죠는 이들 저서에 첨언을 하거
나 일부 번역을 했다. 내용은 인도의 불교 쇠퇴 인식이나 새로운 자료 발견
에 대한 기대 등이 주를 이루었다. 난죠가 『영지회잡지』에 집중적으로 투고
한 시기는 1885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 정도의 시기였지만, 독자들은 난
죠가 영국 유학도 갔다 오고, 현지에 인맥도 가진 ‘인도통’으로 인식했다.
이와 관련해 메이지유신에 활약한 정토종 승려 후쿠다 교카이福田行誡가 난
죠에게 인도에서의 범어 보급이나 불교현황, 승려와 신자 등 인도불교에 관
한 15개의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난죠가 인도에서 유학했다고 오해를 한 후
쿠다의 질문에 난죠는 『문대잡기問對雜記』라는 책자를 간행해 직접 ‘인도 유학
을 하지 않았다’, ‘인도의 지리는 영국의 인도 관련 저서들에 의지해 답을 했
다’라고 고백한 에피소드도 있다. 더해서 스승인 막스 뮬러는 편지를 보내 불
전 수집을 재촉했다. 난죠는 가사하라와의 약속, 인도의 역사적 의미, 막스 뮬
러의 기대, 세간의 오해 등이 결합해 인도에 대한 동경이 더욱 강해졌다.
3개월간의 인도기행
난죠의 인도행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성사되었다. 1887년 1월 난죠는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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