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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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2호 | 거연심우소요 居然尋牛逍遙 22 | 원래 석비의 글씨체는 예서隸
태자사지 ③
書나 해서楷書였는데, 행서로 쓰
기 시작한 것은 왕희지체를 서법
의 전범으로 세운 당 태종太宗(李世民,
김생의 행서체와 재위 626~649)이 628년에 여산廬山
고승들의 비문 온천에 들었을 때 세운 「온탕비溫湯碑
(=溫泉銘)」를 행서로 쓴 것에서 비롯한
다(사진 1). 그 후에도 태종은 647년에
정종섭
당 고조高祖(李淵, 재위 618~626)가 태
원太原의 진사晉祠에 제사를 지낸 것
을 쓴 「진사명晉詞碑(=晉詞銘)」도 행서
체로 써서 세웠다(사진 2).
행서체로 된 고승의 돌 비석
태종은 648년에 조공사로 온 신
라의 김춘추金春秋(603~661)에게 자
신이 써서 세운 이 2기의 비를 탁본
하여 주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성
골聖骨의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眞德
女王(勝曼, 재위 647~654)이 647년에
즉위하여 반역을 꾀한 비담毗曇 등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
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30여 명을 처형하고 신라를 쳐들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헌법학 원
론』 등 논저 다수. 온 백제군을 김유신金庾信(595~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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