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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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경顔眞卿(709~785) 등 중국 명필
의 글씨를 익혀 당대 일본 최고의 명
필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그의 뛰어
난 서법은 「금강반야경해제金剛般若經
解題」에서도 볼 수 있고(사진 10), 왕희
지체를 구사한 백미로 평가받는 친필
본 「풍신첩風信帖」은 국보로 보존되고
있다(사진 11).
고려 왕조가 개국한 초기에는 엄정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문종文宗(재위
1047~1082)에서 예종睿宗(재위 1106~1122)
에 이르는 기간에는 나라도 안정되고
학문과 문화도 만개하는 시기를 맞이
사진10. 공해 「금강반야경해제」.
하면서 문인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함
께 글씨도 구양순체의 방정함에서 벗
어나 왕희지체를 높이 평가하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에 따라 비의 글씨
도 왕희지체가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고려시대 왕희지체의 최고의 정점을 찍은 이가 바로 고려 제일의 명필
이기도 한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1069~1158) 화상이다. 우리나라 나말
여초羅末麗初의 이 시기에 일본에서 왕희지체의 진수를 얻어 명필로 이름
을 떨친 사람으로는 헤이안[平安] 삼절三絶로 평가 받는 오노노 미치카제(小
野道風, 894~966)와 후지와라 유키나리(藤原行成, 972~1027)가 있다(사진12, 사
진 13). 김생의 글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이어져 버렸는
데, 신라, 고려, 일본에서 살아갔던 명필들의 글씨와 왕희지체의 유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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