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고경 - 2022년 8월호 Vol.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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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한 미앙궁 와당. 萬年未央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4.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 부분.



          의 글씨를 중시한다(사진 3). 추사선생도 예서 공부를 함에 있어 한나라의

          예서를 최고로 평가하고 학습하였다.
           아무튼 이 당시에 당나라에서 행서로 비를 세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신라에서는 아직 비문 글씨는 해서로 썼다. 그러나 왕희지의 글씨는 당 태

          종부터 최고로 평가하고 서법의 전범으로 세워두었기에 신라에서도 왕희

          지 글씨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자료를 구하여 배웠다고 보인다. 신라에서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하는 글씨가 전범으로 자리를 잡아 내려왔으나 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진골 세력이 왕권을 장악하고 문화가 사치와 화려함으

          로 나아가고 사회가 이완되면서 왕희지체가 유행하게 되고, 비도 왕희지의

          행서체 글씨를 집자하여 세우거나 왕희지체로 쓰는 경우가 생겨났다.
           김생이 왕희지체를 구사한 것도 이러한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

          다. 801년에 조성된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
          碑」는 왕희지의 해행楷行을 보는 듯이 착각할 정도로 왕희지체로 잘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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