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고경 - 2022년 11월호 Vol.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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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출입은 사상적 뉘앙스를 완전히 바꿀 수 있어 모두 실었다. 이러한 게
송을 남기고 소주韶州 동평산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입적하였다. 다
음해에 제자들은 영골靈骨을 앙산으로 모셨으며, 후에 시호를 ‘지통선사智
通禪師’, 탑호를 ‘묘광지탑妙光之塔’이라고 하였다. 혜적의 입적 시기는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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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불조통기』 권42에서 “대순大順 2년(891)” 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문사제에서 법제자가 된 향엄지한
위산영우의 또 다른 제자인 향엄지한香嚴智閑(?~?)도 위앙종을 논함에
있어서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지한의 전기는 『경덕전등록』 권
11과 『송고승전』 권13, 『오등회원』 권9 등에 실려 있지만, 그의 구체적인 출
생과 입적 시기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오등회원』의 전기에 따르
면, 그는 청주淸州 출신이고, 세속을 싫어하고 책을 가까이하였으며, 제
방諸方을 지켜보며 도道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지한은 먼저 백장百丈을 참알하여 총명함을 인정받았지만, 깨달음은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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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장이 입적한 이후에 위산영우에게 참알하였다. 따
라서 영우와는 동문 사형제이지만, 법으로는 제자라 하겠다. 그러나 영우
의 문하에 와서도 한동안 깨닫지 못하여 영우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듣고,
그동안 모았던 기연어구機緣語句들을 점검하였지만, “그림의 떡으로는 굶
주림을 채울 수 없다.”라고 탄식하고 모두 불살라 버리면서 “이생에 불법
을 배우지 못할 바에야 죽이나 밥을 먹어치우는 중이 되어 오랫동안 심신心
8) [宋]志磐撰, 『佛祖統紀』 卷42(大正藏49, 389c), “大順二年, 袁州仰山慧寂禪師入寂.”
9) [宋]普濟集, 『五燈會元』 卷9(卍續藏80, 191a), “靑州人也. 厭俗辭親, 觀方慕道. 在百丈時性識聰敏,
參禪不得. 洎丈遷化, 遂參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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