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고경 - 2022년 12월호 Vol.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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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 있는 큰스님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단순한 논쟁
             으로 치부하지 않고 조동종을

             비롯한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

             운 것은 탄잔의 학문적 호기심
             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만년에 탄잔은 스스로 “나              사진 4. 다이츠 케이산 친필 편액. 쇼후쿠지昌福寺 소장.

             는 원래 학문적 접근을 좋아하

             기 때문에 맹목적인 신봉은 꺼린다.”라고 회고했다. 즉, 그의 입장은 기도
             나 장례 등 의례적 행위를 통해서 종교적 믿음을 찾아야 한다는 불교 실천
             자들과 맥을 같이한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학승이라는 입장에서 조동종을

             시작으로 천태종까지 종파를 가리지 않고 당대의 거장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후의 행보는 교토의 신쇼지心性寺와 에도의 쵸도쿠인長德院 주지로 취
             임하는 등 순풍을 탔으나, 다시 한 번 탄잔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

             어났다. 네덜란드 의학을 공부한 코모리 슈지小森宗二와의 논쟁이 그것이

             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는 철저한 쇄국정
             책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에도시대에 서구 학문은 모두 네덜란드를 통
             해 유입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히 연구된 학문이 서양의학으로 18

             세기 후반에 이미 서양의 인체해부서가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코모리 역

             시 시대의 조류를 타고 의학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탄잔과 코모리의 논쟁
             의 요점은 인체 안에 어디가 마음인가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탄잔의 대패
             였다. 불심이나 팔식심왕八識心王이 실제 몸 안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결국

             은 공론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탄잔은 불교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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