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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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들이다. 전선에서 적을 살상하는 것은 불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태허는 훈련총감부에 서신을 보내 불교계의 입장을 전하였다. “승려들

          끼리 훈련을 받겠다. 복장은 우리에게 맡겨라. 간편하되 원형은 유지하고

          싶다. 두 가지 사항만 허락하면 일반인과 똑같이 훈련에 참여하겠다. 단 훈
          련을 마친 후 전투부대에는 배속시키지 말아 달라.”고 청하였다. 정부에서
          는 태허의 요청을 수용하였다.

           그 뒤 태허는 전국 사찰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출가한 몸이지만, 국가를 뒤로 하지는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계속된 우리의 근대화는 일본의 파괴에 직면했다. 비분을 가눌 길 없
          다. 비바람이 외로운 등불을 핍박한다. 목탁 두드리며 희생된 항일 전사를

          추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귀와 마주하면 용기가 솟는 법이니, 정부

          의 통일된 지휘하에 난민 구호와 전쟁 지식을 습득하기 바란다. 몸을 던져
          국가와 인민을 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길이다. 의학 상식
          과 군 기본동작을 익히고, 삼민주의와 정치사상 같은 학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밥값은 각자 부담하고 부족한 부분은 사찰에서 지원하라.” 태허의

          이러한 말에 전국의 사찰에는 승려훈련반이 발족하였다. 근대불교가 마주
          한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불교 혁신운동의 전개



           중국 근대불교의 ‘시대 정신’이라고까지 불렸던 태허는 1889년 절강성
          숭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해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젊은 어머니는 4

          살까지 그를 키우다가 개가해서 태허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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