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1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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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청년 불자들에게 ‘불교청년호국단’ 조직을 권하였다. 종군과 모금, 선전
활동을 독려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자, 태허는 당시 사람들에
게 ‘정치 승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 저명한 문학자인 노신
魯迅은 태허를 높이 평가하며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사상의 폭
과 깊이는 끝을 헤아리기 힘들다.”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태허를 함께 만났던 노신의 수제자는 “많은 사람들이 태허를 정치 승려
라고 깎아내리지만 가당치 않은 말이다. 태허 법사는 ‘근대 화상’이라는 말
이 가장 잘 어울린다. 온갖 명성을 누리면서도 큰스님의 위엄은 한 조각도
찾기 힘들다. 봄바람처럼 모두를 푸근하게 해 준다. 그의 말이라면 뭘 해
도 도리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승려의 전쟁 참여를 둘러싼 논의
항일전쟁이 본격화되고 국공연합이 결성되자 중국정부는 전국의 승려
들에게 징집령을 내렸다. 승려들도 장정이니 장정대에 편입해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러
한 정부의 방침에 대해 승려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쟁
이 벌어졌다. 정부 방침에 찬
성하는 이들은 “우리도 국민의
한 부분이다. 국민 병역의 의
무가 있다.”라고 하였고, 반대
하는 이들은 “우리는 이미 출
사진 4. 태허는 불교개혁의 일인자로서 승려들이 나라
가해서 붓다의 자비를 봉행하 를 위해 싸울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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