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8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P. 148

의 논란이 일었다. 우선 종명은 일제 강점기와 1950년대에 많은 논의가 있
          었지만 결국 조계종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종조 문제는 고려 후기 보조
          지눌의 역사적 위상, 조선 후기 태고법통의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지로

          의견이 갈렸다.

           이능화, 권상로, 김영수 등은 태고법통의 전통적 권위를 인정했고, 이종
          익과 이재열 그리고 송광사 쪽은 조계종의 역사적 상징인 보조지눌을 종
          조로 추대했다. 이종익은 조계종이야말로 역사상의 종파이며 조선시대에

          도 그 법맥과 함께 선교회통의 보조 유풍이 지속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권

          상로와 김영수 등이 조계종의 종명을 찾아 다시 세우는 데는 공헌했지만
          태고종조론은 허구이자 오류라고 비판했다.
           1954년부터 정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비구와 대처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

          는 상황에서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비구 측에서 보조지눌을 종조로 한다

          는 종헌개정안을 냈다. 하지만 당시 종정이었던 만암스님은 이에 대해 부
          모와 조상을 바꾸는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계종의 종조는 개조 도의, 중천조 보조지눌, 중흥조 태고

          보우의 복합적 형태로 귀결되었고, 1962년에 공포된 통합종단 대한불교조

          계종의 「종헌」에도 반영되었다. 이는 선종-도의, 조계종-보조, 임제 법
          통-태고라고 하는 통시적 역사 인식의 반영으로서 점차 현실적 권위를 확
          보해 갔다.
















          146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