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4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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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신해혁명과 손문. 사진 7. 고승 인광印光(1861~1949).
만에 기원정사는 문을 닫았고, 태허는 양주에 있는 승려사범학당에서 공
부를 계속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태허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불교협
진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구 대립이 심해서 불교개혁의 첫 시도는 실
패하였다. 당시 이런 혼란을 타개하려던 고승 경안敬安이 입적하자 태허는
“자신의 불연이 이렇게 끝나는가.”라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방황하였다.
고승 인광印光(1861~1949)의 도움으로 보타산 법우사를 폐관하고 그는 3
년 동안 참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중국불교 경전인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을 처음 본 듯 다시 읽
었으며, 엄복이 번역한 서양 사회과학 책들도 탐독하였다. 실제로 태허는
자신이 엄복과 장태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자술하고 있다. 1917년 3년
만에 폐관을 풀고 나온 태허는 확실히 방향이 섰고 더이상 방황할 일이 없
었다. 1918년부터 그는 불교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불교계의 3대 혁명
태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해에 ‘각사覺社’를 창립하는 것이었다. 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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