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고경 - 2023년 1월호 Vol.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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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독실한 외할머니의 영향
으로 그는 1904년 영파 천동
사天童寺에서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은사 스님은 그
가 허약하여 건강하기를 바
라는 마음에서 태허太虛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사진 5. 기원정사가 있는 남경 금릉각경처.
그는 사찰에서 전통 불교를
공부하는 것 외에도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보았던 톨스토이, 바쿠닌, 푸루
동 등의 사회성 짙은 글들을 탐독하였다. 또한 당시 서세동점의 시대적 고
민을 짊어지고 있던 청년 지식인들을 격동시켰던 글들을 빠짐없이 읽었다
태허의 말에 따르면 “민국이 성립되기 4년 전(1908년)부터 민국 3년(1914
년)까지 강유위의 『대동서』,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 손문의 『삼민주의』,
엄복의 『천연론』, 장태염의 『오무론』, 『민보』, 양계초의 『신민총보』 등의 영
향을 받았다. 선종, 반야경, 천태를 통한 불교 이해로써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면학의 분위기 속에서 태허의 불교 혁신의 사고가 싹
텄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태허는 양인산楊仁山 거사가 설립한 금릉각경처 내 교육기관인
‘기원정사’에 입학하였다. 당시 열 명 남짓한 학생 가운데 절반 정도가 스
님이었는데, 이후 중국 근대 불교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구양경무와 태허
가 양인산의 제자로서 그곳에서 함께 수학하였던 것이다. 구양경무는 거
사로서 재야의 불교 연구를 대표하였고, 태허는 승려로서 출가자를 대표
하였다. 그곳에서는 양인산 거사가 직접 『능엄경』을 가르쳤고, 소만수蘇曼
殊(1884~1918)가 서양 학문에 접근할 수단인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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