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고경 - 2023년 4월호 Vol.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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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한다. 그럼에도 화엄의 지위론을 수행의 기준으로 삼는 데 걸림이 없
다. 송대 이후의 보임론은 기존의 돈오론에 깨달음 이후의 단계를 추가했
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오성불의 종지까지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성철스님은 깨달음 이후 무심의 삼매로 살아가는 무학도인의 삶을 보임
으로 규정한다. 분명히 그것은 주류적 보임론과 내용적으로 충돌한다. 그
럼에도 보임론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대신 간화선의 초석을 마련한 원오
스님의 문장을 집중 인용하여 주류적 보임론을 비판한다. 그 목적은 분명
하다. 보임이라고 불리는 깨달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깨달음 이후 부처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점차적 발전의 궤적이 발견되
기도 한다. 그런데 서툴거나 원숙하거나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번뇌
가 재발하는 일은 없다. 이것이 성철스님이 말하는 깨달음 이후의 삶이고
보임인 것이다.
만약 무엇인가 지키고 떨어낼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결국 실천하는 주
체와 대상이 세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별의 차원이라면 번뇌를 떨어
낸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번뇌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것은 제반 번뇌를
활성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유심의 생멸 현장에 스스로 떨어지기를 자처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성철선에 있어서 최고의 길은 걸림 없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일념
으로 화두참구의 길을 걷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완전한 무심을 증득하고,
그 무심삼매 속에서 유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보임이라는 것이다. 오
로지 무심의 실천을 통해 무심의 완성에 이르는 본분사 만을 강조하는 철저
함은 성철스님 법문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철저함이 수행자를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감로의 법문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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