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23년 4월호 Vol.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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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시간의 앞과 뒤가 끊어진 대혜스님의 경계가 제7지의 무상정
             이었다고 본다. 무상정을 성취하면 망념이 없어서 걸리는 바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8아뢰야식의 미세한 번뇌가 온전히

             남아 있다. 오매일여의 멸진정 선정을 통해 이것을 타파할 때 온전한 진여무

             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혜스님의 이 체험은 뛰어난 경계일 수는
             있어도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입장이다.
               그런데 위 행장에는 원오스님이 그것을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구절 대신 전념으로 보임하게[專念保任] 했다는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 이

             렇게 하면 대혜스님의 앞뒤가 끊어지는 체험은 깨달음이 된다. 그리하여
             대혜스님이 돈오 이후 보임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하는 길을 걸었다는 논
             리가 성립한다. 당시 대혜스님은 ‘펄펄 끓는 기름 솥을 보면서 핥지도 못하

             고 떠나지도 못하는 개’와 같은 심경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중이었다. 스승

             원오스님도 그것이 금강의 올가미[金剛圈], 목에 걸린 밤송이[栗棘蓬]에 비유
             되는 화두일념의 경계라고 평가한 바 있다. 어떻게 보아도 그것은 깨달음
             이후 번뇌의 잔재를 걷어내는 수행으로서의 보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장』의 행장에서는 왜 보임의 구절을 추가한 것일까? 그 의

             도는 명확하다. 간화선의 완성자인 바로 그 대혜스님이 ‘깨달음 →  보임수
             행 → 큰 깨달음 → 더 큰 깨달음’의 여정을 거쳐 그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 돈오점수로서의 보임론이 강한 설

             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돈오 이후 수행이 필요하다는 보임론이 논리적 억
             지와 텍스트의 변형을 자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정도의 논
             리적 비약과 텍스트의 재해석은 불교사에 출현한 여러 교리에 흔히 발견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철스님의 『선문정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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