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고경 - 2023년 4월호 Vol.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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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임론의 경우 성철스님이 동의해 마지않는 원오스님의 주장은 오히려
          소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번뇌의 잔재를 걷어내는 수행으로서의 보
          임론이 주류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징吕澄 같은 근대 학자는 ‘발심

          → 해오 → 해오와 실천의 일치[解行相應] → 보임’의 방식으로 선종의 보임

          론을 정리했던 것이다.


            보임 실천의 자세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 아니! 이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 옳고 그름의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 참선수행에 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실천을 옳고 그름의 틀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생

          각해 보자. 일찍이 대혜스님은 묵조선을 묵조사선이라고 규정했다. 사마

          외도의 선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혜스님은 사마외도에 속하는 묵조선
          의 완성자인 굉지스님과 진심 어린 지음知音의 교류를 이어갔다. 굉지스님
          의 견처를 인정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묵

          조선이 사마외도일 수는 없다. 당장 성철스님만 해도 선종사에 출현한 5

          가 7종의 종파에 우열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니까 대혜스
          님의 묵조선 비판은 간화선을 널리 펼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일 수 있을지
          언정 그 뜻이 시비를 가리는 데 있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적어도 대혜

          스님은 우리를 그 시비의 마당으로 안내할 의도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예컨대 대승불교의 교리에서 성문
          과 연각을 소승으로 낮추어 보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적자
          를 자처하는 한국불교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천이백 제대아라한(성문)’

          에 예경하고 ‘독수성(연각)’에 경배한다. 선종의 돈오론은 교학의 지위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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