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고경 - 2023년 5월호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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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다. 그래서 모든 지향, 심지어 부처와 깨달음까지 희생해야 한다. 이
희생의 수준에 따라 화두는 명료성과 지속성을 더해 간다.
화두의 명료성과 지속성
그리하여 좌복에 앉아 좌선을 하거나 몸을 일으켜 활동을 하거나 간에
화두가 또렷하게 된다. 동정일여動靜一如다. 이 차원에서 보면 여러 공안들
의 맥락이 쉽게 이해된다. 그것을 설명하고 해설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그
렇지만 언어와 사유의 차원으로 다가갈 수 없는 속 깊은 사연에 대해서는
그저 까맣기만 할 뿐이다. 알고 이해하는 범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
혜스님이 원오스님 회상에서 마흔아홉 번이나 정답을 들고 방장실을 찾아
갔지만 매번 “아니다.”라고 퇴짜를 맞았던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기왕의 성취를 통째로 내려놓고 새롭게 화두의 참구에
들어가야 한다.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는 자아를 희생하고, 또한 그 얻은 경
계를 희생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그
렇게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꿈
속에도 화두가 분명한 국면을 맞게 된다. 몽중
일여夢中一如다. 가슴에 체증이 내려가듯 공안
들이 쉽게 풀린다. 깨어 있을 때 번뇌에 휘둘리
는 일이 없고 잠을 잘 때 꿈으로 헷갈리는 일이
없다. 깨달음을 선언해도 좋을 것 같은 지점이
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몇 가지 증거를 들어 이
러한 몽중일여가 화엄 7지의 경계라는 것을 밝
사진 2. 간화선의 요체를 담고 있
는 대혜스님의 『서장』. 힌다. 화엄 7지는 먼 여행을 시작하는 지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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