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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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의 창건과 부침
역사적으로 은해사는 팔공산을 두고 동화사와 양대 축을 형성했을 만큼
크고 작은 많은 사찰들을 거느렸고, 인종의 태실이 뒷산에 조성되면서 왕
실의 후원으로 사세가 번창했던 때도 있었다. 그 후에 화재로 인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789년 무렵에는 은해사의 산내
암자가 15개에 이르렀을 만큼 번창하였지만 오늘날에는 9개 암자만 남아
있다.
은해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올라간다. 신라의 제41대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이 되는 김언승金彦昇(?~826)은 동생인 이찬伊湌 김제옹金悌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제40대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의 형제들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 왕으로 즉위한 809년(헌덕왕 1)에 그 당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나라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현재의 운부암雲浮
庵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해안평海眼坪에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해안사海眼
寺이고, 이 절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은해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0
년 김달현金達鉉이 지은 「은해사중수기銀海寺重修記」의 내용이다.
1943년에 세운 「팔공산은해사사적비八公山銀海寺事蹟碑」에는 혜철국사惠
哲國師(785~861)가 해안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건너가 강서성 건주虔州에서 종풍宗風을 날리던 서당지장西堂地藏
(735~814) 선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한 후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太安寺(泰安寺)에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그의 활동
시기와 비교하여 보면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애장왕은 13살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인 김언승이 병부령으
로서 섭정攝政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가야산에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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