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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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이 되는 해인사海印
寺를 창건하기도 하였
고, 신라와 일본 간에
중단된 외교관계를 복
원하기도 했다. 그런
데 헌덕왕 때는 천재
지변과 기근으로 나라
가 어지럽고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급기
사진 2. 김정희 글씨 <불광> 현판.
야 웅주熊州 도독都督
김헌창金憲昌(?~822)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780?)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고, 그 후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825)
이 도적들을 규합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고 죽었다.
헌덕왕은 10년간 재위하고 죽었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시중侍中을 지낸
그의 동생 김수종金秀宗이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제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이다.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에게는 후사가 없었다고 되어 있는
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헌덕왕에게는 15세에 출가한 아들이 있
었고, 그가 832년에 동화사를 창건한 심지心地(?~?) 화상이라고 한다. 유
식법상唯識法相을 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645년 인도에서 귀국
하여 불경을 번역하고 유식론을 중심으로 하는 법상종이 형성된 지 200여
년이 지난 때이다. 팔공산 높은 곳에 있는 묘봉암妙峰庵과 중암암中巖庵도
심지화상이 세웠다는 말도 전해 온다.
해안사가 창건된 후 어느 때 은해사로 개칭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
려시대 관리를 지낸 영천 출신의 이탄지李坦之(1085~1152)의 「이탄지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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