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5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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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유학자들과 인물들이 또 사라져 갔
             다. 대유학자이자 조선 성리학의 선구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도 이런 와중에 윤원형 세력들이 조작한 ‘양제역 벽서사건’에 무고하

             게 엮여 평안도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언적 선생이 살

             았던 곳은 현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良洞 마을이
             고, 그를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이 옥산서원玉山書院이다(사진 4).
               조선왕조 개창 후부터 왕권과 이를 둘러싼 사대부와 유학자들 사이에 벌

             어진 정치투쟁을 보아 온 문정왕후는 왕권이 유교의 늪에 다시 빠져들어

             국정의 혼란을 겪기보다는 불교를 중흥시켜 이 혼란의 소용돌이를 잠재우
             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불교와 유교에 모두 능통한 당대의 대덕 허
             응당虛應堂 보우普雨(1506?~1565) 대사를 국사國師로 삼아 불교를 중흥시키

             는 일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갔다.

               이런 국면에서 유생들이 격렬한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은 불을 보듯 뻔하
             였다. 결국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바로 각지의 유생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보우화상을 죽이라는 상소도 빗발쳤다. 명종은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런 상소들을 물리쳤으나 보우화상은 제주

             도에서 목사인 변협邊協(1528~1590)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무과 출신
             으로 한때 왜적을 진압하며 승승장구하던 변협은 이 사건으로 벼슬을 그
             만두었지만, 보우화상 장살사건의 내막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법영대사의 중창과 사세 확장



               1563년에 은해사가 화재로 다시 소실되자 1589년(선조 22년)에 법영法暎
             대사가 현재의 자리에 대대적으로 당우들을 중창하고 법당을 극락전極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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