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3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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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산안개가 가득 피어오르는 때 은해사로 발걸음을 옮긴 사람은 이
광경을 만날 수 있으리라. 산 속으로 들어가면 구름 속에 잠기어 내가 구
름인지 구름이 나인지 알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공산 가득한 운
해 속에 운부암雲浮庵도 있지 않은가. 그 가없는 바다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진리의 바다라면 진정 가슴 벅차오르는 환희歡喜의 순간을 맞이하리라. 그
야말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의 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1521년(중종 16)에 인종仁宗(1544~1545)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은해사 뒷산에 묻고 태실을 건립하면서 백흥암百興庵과 은해사
가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기에 이르렀다. 1545
년(인종 원년)에는 큰 화재로 사찰이 소실되었지만 천교天敎 화상이 왕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아예 해안평에서 2.8km정도 떨어진 지금의 장소로 법당
을 옮겨 새로 절을 짓고, 절의 이름도 그대로 은해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은해사의 본찰 가람은 인종~명종시대의 출범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文定
王后(1501~1565)가 어린 아들 명종明宗(1545~1567)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
簾聽政을 하면서 불교 진흥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갔을 때는 그간 억
압을 받아 왔던 불교로서는 부흥할 수 있는 큰 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
다. 이 시기에는 사대부나 유생들이 사찰에 대해 횡포나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대왕대비 문정왕후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은해사에는 법당이 중건
되기도 했다.
인종은 아버지인 중종中宗(재위 1506~1544)과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章
敬王后(1491~1515) 윤씨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었다. 중종은 첫째 왕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두 번째 장경왕
후는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문정왕후 윤씨가 세 번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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