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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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금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커먼 속
내가 드러난다. 아뢰야식 차원의 무심이 바로 그러해서 캄캄한 무지각의
지배를 받는다. 고요함은 성취되었지만 밝은 관찰이 없다. 만약 이 고요함
에 만족하여 머물러 버린다면 그것은 바른 수행도 아니고 더더구나 바른
깨달음도 아니다. 이것이 성철스님의 강조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뢰야식 차원의 무심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무쇠를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신비한
영약이 한 방울 떨어지는 순간 무쇠가 황금으로 변하듯이 선지식의 한마
디 말에 궁극의 깨침이 일어나게 되는 지점이다. 선정의 고요함에 집착하
는 선정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심의 선정이 필요 없
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상적상조의 참선, 어떻게 할 것인가
청량국사에게 황제가 질문을 한다. “불교에서는 지혜가 최고다. 6바라
밀도 결국은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것이다. 굳이 선정을 함께 닦을 필요가
있는가?” 이에 청량국사가 대답한다. “수행의 현장에서 고요함은 밝은 통
찰을 심화시키고, 밝은 통찰은 고요함을 완전하게 한다. 고요함과 지혜가
함께 흘러야 비로소 부처의 열매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고요함과 비춤은 순차적인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으로도 고요함이
먼저 있어야 밝은 비춤이 찾아오게 될 것 같다. 파도가 고요해져야 천지만
물이 분명하게 비춰지는 일이 있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천적으로 보
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시적이다. 청량국사가 밝힌 것처럼 선정과 지
혜, 고요함과 비춤은 서로를 증장시키고 완성해 주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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