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23년 7월호 Vol. 123
P. 30
사진 1. 『잡비유경』.
어주는 스님이 찾아왔다가 술독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는 역시 화를 냈
다. “자신만을 시봉한다더니 다른 스님을 숨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이렇
게 꼬리를 물고 싸움이 커지는 중인데 한 선지식이 지나다가 그 상황을 알
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술독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술독을 깨뜨렸다. 거기에는 아무것
도 없었다. 『잡비유경』의 얘기다.
우리의 삶은 이 술독 얘기보다 더 난장판이다. 이 난장판은 끝나야 한
다. 허망한 그림자를 실제로 착각한 데서 일어난 근거 없는 싸움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술독은 깨져야 한다. 그 순간 사람들은 그림자의 실체 없음
을 보고 다툼을 멈추게 된다. 조용함이 찾아온다.
그런데 편안해졌으니 된 것일까? 조용해졌으니 그만일 것일까? 우리는
이 이야기의 후일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술독이 깨진 자리에 공허만
이 남는 것은 아니다. 착각과 집착의 대상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은 본래
의 자성으로 귀환한다. 그리하여 자성의 자리에 발을 딛고 서서 아내와 남
편, 친구와 친구, 스님과 신도라는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통찰하는 일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