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고경 - 2023년 9월호 Vol.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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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큰스님께 “저를 스님이라 부르
                                          시니 사숙님들께 무안해 못 견디겠
                                          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아니다.

                                          그들은 센세이라고 불러도 너는 스

                                          님이라  불러야겠다.  괘념치  말아
                                          라.”라고 하셨다 합니다.
                                            용성 대종사께서는 “나와 함께 서

                                          울 대각사로 가서 나를 도와주었으

                                          면 좋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
          사진 9. 용성진종(1864~1940) 스님.       다고 합니다.
                                            “노스님께서 서울에 함께 가자고

          하도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부산역까지 모시고 가서 짐을 실어드리고 나는

          도망쳤지. 그런데 범어사는 동산스님이 무서워 못 가고, 통도사 백련암에
          서 동안거를 났지.”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독립선언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 등에 매진

          하던 용성스님이 성철스님을 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성철스

          님이 사회활동보다는 견성성물이라는 초심의 길을 선택하셨던 것입니
          다. 성철스님은 1937년 가을에 용성 대종사 노스님과 헤어지고 통도사 백
          련암, 범어사 내원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선원, 동화사 금당 등

          제방선원에서 동안거·하안거를 나며 용맹정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용성 대종사께서는 1940년 (음) 2월 24일 대각사에서 세수 77
          세, 법랍 62세로 원적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1940년 마하연
          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은해사 운부암에 잠시 머무르다 동화사 금당선원

          에서 동안거 용맹정진을 하던 중에 마침내 칠통을 타파하고 오도송을 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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