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고경 - 2023년 11월호 Vol.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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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휘 선사에게서 공부하고 선법을 전수받아 귀국하였는데, 귀국 후 홍척洪
          陟(?~?) 선사가 산문을 연 실상사實相寺에 주석하였다. 뒤에 그의 법을 이
          은 진경眞鏡 대사 심희審希(855~923) 선사가 김해 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

          문鳳林山門을 개창하게 된다.

           문종을 이어 무종武宗(재위: 840~846)이 당 황제로 즉위하고 문성왕을 ‘상
          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 해주기도 했지만, 곧이어 불교를 대대적
          으로 탄압하는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으로 외국 유학승들을 귀국 조치함

          에 따라 신라의 도당 유학승들도 대거 돌아오게 된다. 이 시기 당나라는 당

          쟁이 치열했고 환관들의 횡포로 나라가 심하게 흔들리던 때였다.
           회창 2년(842)부터 무종이 죽을 때까지 자행된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사
          원寺院 4,600여 개와 사액 사찰인 초제招提 및 난야蘭若 40,000여 개가 폐

          지되었고, 환속된 남녀 승려는 260,500명에 이르렀으며, 수천만 개의 사

          전寺田은 국가에 몰수되었고, 민간인으로 편입시킨 절의 노비는 150,000
          명에 이르렀다. 이 난리통에 도읍인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그나마 살아남
          은 절은 4개 정도였고, 지방의 주도州都에서는 1개씩만 살려두었다.

           문성왕이 즉위하고 6년이 지난 해 그가 극찬해 마지않았던 궁복이 자기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청해진淸海鎭을 근거로 반란
          을 일으켰다. 혼란 속에 무주武州의 별가別駕 염장閻長(=閻丈)이 궁복의 목을
          잘라 죽이면서 겨우 반란을 평정하였지만 왕실의 권위는 심하게 추락하고

          있었다. 이 당시 신라는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사망 이후에 왕위쟁탈

          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문성왕이 병으로 죽자 그의 유조遺
          詔에 따라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인 김우정金祐靖(=誼靖)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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