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2 - 고경 - 2024년 1월호 Vol.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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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碑閣 안에 그대로 서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탑비 등을 새로 세
우는 일이 많았는데, 이때에는 부재部材가
부족하였는지 남아 있는 옛 부재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튀어나온 두 눈에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는 거북은 높이가 높은 편이다. 머리 아
래쪽으로 수염이 길게 내려온 모양은 고려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귀부 양식이다. 지
붕돌은 용마루에 머리가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용 두 마리를 조각한 특이한 모습을
사진 2. 백련사사적비의 연화문.
하고 있다. 지붕돌의 모양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사대부의 석비石碑 양식을 하고 있다. 비신은 그 옆면에 연
화문蓮華紋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이 양식은 고려시대에 나타나 조선
시대까지 비석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최자 선생이 지은 비문은 1478년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기
때문에 원래의 귀부를 사용하여 비를 세우고자 했을 때에는 최자 선생이
지은 비문을 새긴 원묘국사의 탑비를 세우고 사적비는 따로 세웠어야 옳
은 것인데, 무슨 연유인지 지금과 같이 되어 있다.
<원묘국사비>의 글씨는 선조宣祖(재위 1567~1608)와 정빈靜嬪 민閔씨 사이
에 난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1604~1651)의 아들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 1693) 선생이 쓰고, 그의 동생인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1640~1699) 선
생이 돌에 새겼다. 형제가 모두 명필이었고 북경에도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와 서화에도 큰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우 선생은 왕실의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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