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2 - 고경 - 2024년 2월호 Vol.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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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과 최해는 훌륭한 승려들은 나라와 백성에게 모범이 되지만, 권
          세와 부를 쫓는 승려들은 사대부를 노비 보듯이 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
          치고 있다고 하였다. 지나친 불교 신앙이 오히려 독이 되어 불교가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대부를 노비 보듯이

          한다는 대목은 당시 승려가 사대부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
          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현이나 최해와 같은 고려 말 성리학자들은 불교 자체를 비판하기보

          다 타락한 승려들을 비판한 것이었지만, 불교 자체를 비판하는 유학자들

          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인 1391년(공양왕 3) 6월
          에 성균관 생원이었던 박초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배척할 것
          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성리학자가 쓴 최초의 배불 상소문


              “저 불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백성이 되게 하여 병부兵賦에 충

              당하고, 저들이 머물던 거처를 민가로 만들어 호구를 증가하게 하

              며, 저들의 책을 불살라 그 근본을 영원히 근절시키고, 급여한 전
              지는 군자시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며,
              노비들은 도관都官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여 각 사司와 각 관官에

              나누어 주게 하고, 동으로 된 불상과 기물들은 군기시에 소속시켜

              갑옷과 무기를 만들게 하며, 저들이 쓰던 그릇들은 예빈시에 소속
              시켜 각 사와 각 관에 나누어 주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
              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기르게 한다면, 수년이 되지 않아 백성의 뜻

              이 안정되어 교화가 행해질 것이며, 창고가 가득 차서 나라의 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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