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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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만 승려 수가 12만 명에 이른다. 이는 과장된 수치이겠지만, 도리어
          송시열의 상소에 등장하는 17만 명의 승려 수가 그리 과장된 표현이 아니
          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승려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는 2천만 명의 인구에 승려 수가 7천

          명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일까? 이 역시 『영조실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승역僧役이 평민들보다 많기 때문에, (균역법을
              시행하여) 감필減疋한 이후로부터는 승려 되는 자가 적다고 합니다.”

                                                            - 『영조실록』 27년, 1751년 11월 26일.



           1751년(영조 27) 9월에 15~59세의 양인으로서 군대에 가지 않은 보인保
          人에게 1인당 연간 무명 2필에서 1필로 줄여주는 균역법을 공포하였다. 균

          역법의 시행으로 승역에 비해 양역良役이 더 가벼워졌다. 이로써 양인들은
          더 이상 삭발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승려 수의 추이를 정리하자면, 초기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

          로 백성의 1/3 정도가 승려였는데, 국가에서 결혼한 대처승에게 도첩을 지

          급하지 않고 환속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승려 수가 점차 줄어들
          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대략 1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임
          진왜란 이후 다시 늘어나서 17세기 후반 약 17만 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18

          세기 중반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다시 승려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

          하여 20세기 초에 인구는 2천만 명으로 늘어났으나 승려 수는 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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