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고경 - 2024년 4월호 Vol.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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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여 그 사정을 알 수 없다고 하였고, 당시 남아 있는
          당우로는 모니전牟尼殿, 금당, 극락전, 승당, 동실, 팔상전, 명부전, 노전爐
          殿, 수령들과 70세 넘은 호장인 안일반安逸班의 기록을 봉안한 누각과 조사

          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影閣이 있으며, 일주문, 천왕각, 우화루羽化樓가 아

          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고,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질러 있듯이 계곡을 가로
          질러 양안에 걸쳐 있는 수광루水光樓가 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백련암白蓮庵과 운수암雲水庵이 있고, 무너진 지 오래된 금당과 승당을 이

          번에 승려들과 신도들이 힘을 모아 고쳐지었다고 되어 있다. 그때에는 현

          재의 가운루를 수광루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현재의 가운루의
          이름은 가허루 → 수광루 → 가운루로 변경된 것으로 추론된다.
           신유한 선생은 「고운사사적비」의 비문을 짓기 그 이전인 1728년에 정월

          화상의 부탁을 받고 그해 중건한 운수암의 「운수암기雲水庵記」도 지었는데,

          문소현聞韶縣 북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등운산의 모습이 워낙 빼어나 절을
          세웠다고 하고, 그 절 서남쪽에 있는 운수암의 풍광은 고운사보다 더 빼어
          나다고 했다. 그 후 이 운수암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강원을 지어 승려들

          의 공부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근래에 신축한 화엄승가대학원이 터를 잡고

          있다.
           아무튼 고운사에 관한 기록은 중종中宗(재위 1506〜1544) 때에 저술된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이지  않고,  영조英祖(재위  1724〜1776)

          대인 1757년에서 1765년 기간에 출간된 전국 읍지를 종합한 『여지도서輿地

          圖書』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운사는 임진왜란 이후 현종대인
          1668년에 이르러 가허루駕虛樓와 봉황문鳳凰門, 천왕전天王殿이 지어지고,
          1670년에 시왕전十王殿 등의 당우들이 세워지면서 사세가 살아나기 시작

          하였고, 현재의 가람배치의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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