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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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여행에서 돌아온 최 작가는 성철스님이 마치 아버지처럼 느껴
             져 여성지에 있던 성철스님 사진을 스크랩해서 글 쓰는 책상 앞에 5년 동
             안 붙여 두고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 작가는 “저는 세상을 살면

             서 저보다 형뻘이면 형님, 동생뻘이면 아우로 호명을 통일해서 살고 있습

             니다. 앞으로는 원택스님을 형님이라고 부를 터이니 대답이나 잘 하십시
             오.”라고 해서 박장대소를 하며 헤어졌던 기억입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형님! 시간이 있으면 예수님 전기를 한 번 꼭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철 종정스님에 대해서도 한 800매 정도는 쓰고 싶습니

             다.”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아쉽고 아쉽습니다.


                봉은사와의 인연, 영암 큰스님 다비식 준비




               소납은 성철 종정예하의 시자로서 어느 산중의 큰스님이 열반에 드시면
             종정예하의 추모사를 모시고 조문 사절로 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초겨
             울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날씨가 좀 쌀쌀했습니다. 어느 산중 큰스님의 다

             비식에 참석했습니다. 큰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는 동안 소납은 ‘어떻게

             하면 법구에 결례를 끼치지도 않고 대중들이 무료하게 기다리지도 않게 하
             면서 큰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법답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
             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가던 소납에게 결정적 힌트를 제공하는 다비식이 있

             었습니다. 1981년부터 봉은사 주지로 주석하고 계신 밀운스님께서 주도하
             신 영암 큰스님의 다비식이었습니다. 영암 큰스님은 1975년 봉은사의 주
             지를 맡아 오늘날의 봉은사가 있도록 큰 헌신을 하신 스님이십니다. 영암

             큰스님께선 해인사 주지도 하셨고 원로위원도 하셨고 해서 해인사의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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