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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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나무로 난방과 취사를 했기 때문에 나무를 하는 부목 처사와 농장관리
인, 산감, 매표소 관리인, 야경처사, 반찬을 만드는 채공보살과 종무소에서 소
임을 보는 스님들을 합치면 항상 200명이 넘는 대중이 함께 살았습니다.
성철스님이 방장으로 계실 때에 경전과 선어록을 배우는 해인사승가대
학은 속가로 말하면 서울대학과 같았습니다. 입방하기가 힘들어서 산내 암
자에서 3개월 살고 큰절로 옮겨 총무, 교무, 재무, 종무소, 원주실, 주지실
시자侍者 소임을 거치면 보통 6개월이 걸리는데, 이런 과정을 그쳐도 지
객知客 스님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합격해야만 해인사승가대학에 입방
할 수 있었습니다. 선원은 선열당과 퇴설당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열당에
선 젊은 스님들이 하루에 10시간씩 정진하고 퇴설당에선 구참스님들이 하
루에 12시간씩 가행정진을 하였습니다. 선원 역시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나 방부를 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제방의 스님들은 해인사에서 한 번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
다. 이때 행자실의 임무는 20~30명의 행자들이 아침예불 후 하루 3끼 200
명이 넘는 사부대중들을 위하여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이고, 봄·여
름·가을철엔 채소밭에 가서 국과 찌개를 끓일 채소를 채취하고, 일주일
에 한 번씩 경내에 있는 방앗간에 가서 두부를 만들고, 사시불공 때는 대
적광전과 각 단에 공양미를 올렸습니다. 승가대학 스님들과 선원 스님들
이 울력을 할 때는 간식으로 국수를 삶아 드렸습니다.
해인사에 살면 일주일에 한 번씩 스님, 행자를 가릴 것 없이 경내에 있
는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해야 했는데, 이유는 가야산에 불이 나면 해인사
스님들이 달려가서 불을 꺼야 하는데 주력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영암스님
이 주지를 하실 때 축구장을 만드신 겁니다. 행자실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승가대학에서 스님들이 오셔서 염불과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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