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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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1724), 정암正庵 이현익李顯益(1678∼1717),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1689∼1756),
             위헌韋軒 송교명宋敎明(1691∼1742),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1725∼1789), 하서荷棲 조

             경趙璥(1727∼1787), 지암遲庵 이동항李東沆(1736∼1804), 옥천玉泉 강주호姜周祜
             (1754∼1821), 강주우姜周祐(1757∼1817),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1820∼1882), 호

             산壺山 박문호朴文鎬(1846∼1918),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 등 많은
             선비들이 속리산을 유람하고 글을 남기거나 시를 짓기도 했다. 거칠고 추
             악한 속세를 멀리하고 자신을 지키며 산 은자隱者들도 많았으리라.

               나라 일을 하려고 출사한 성운 선생도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를 겪으면

             서 처가인 속리산 종곡鐘谷에 대곡서실大谷書室을 짓고 학문에 매진하며 살
             았다. 그는 왕의 외척세력들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권력투쟁으로 전개
             된 을사사화乙巳士禍(1545)에서 작은 형이 장살杖殺되는 일을 겪고는 아예

             관로와 단념하고 여러 차례의 조정의 부름도 모두 거절한 채 속리산인이

             되었다. 그의 <유속리游俗離> 시 가운데 한 수이다.



                  사마계담상卸馬溪潭上
                  징파사석시澄波似昔時

                  녹래간척이鹿來看擲餌
                  용출청아시龍出聽哦詩

                  곡조무범향谷鳥無凡響
                  암운유영자巖雲有令姿

                  진환인이사塵寰人易死
                  회수총류류回首塚纍纍



                  말고삐 풀고 계곡 가에 내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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