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6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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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하자 경북 영천에서 속리산까지 유람을 떠났다. 1776년 가을날 떠
          난 원행遠行은 여러 선비들도 만나고, 천하의 산천도 둘러보며 심신을 다
          스리는 여정이었다. 그해는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오랜 탄압 속에서 질곡

          의 삶을 살아왔던 영남의 선비들에게는 희망이 될 정조正祖(1776∼1800)가

          즉위한 해였다. 칠계漆溪(옻골)의 스승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
          선생댁에 들러 계획을 알리고 떠난 먼 여정을 <유속리산록遊俗離山錄>으로
          남겼다.

           그는 대추나무 숲이 펼쳐진 보은을 지나 박석고개를 넘어 속리산 동구

          로 들어갔다. 몇 굽이를 돌아 드디어 법주사法住寺의 금강문金剛門 밖에 이
          르러 말에서 내렸다. 이때부터는 산수를 몸으로 느끼려고 작시作詩도 멈추
          었다. 출발할 때 이헌유 현감에게 보낸 시 한 수는 이렇다.




              도불원인인원도道不遠人人遠道
              산비이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
              기어속리산하리寄語俗離山下吏

              가능시도속리산可能時到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인간세상 떠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떠나네.

              속리산 아래 관로의 벗에게 소식 전하노니

              제때에 속리산에 이를지 이를 알 수 없구려.


           속리산을 찾아 나선 여정을 도를 찾아가는 발걸음으로 표현하였다. 『중

          용中庸』에서 공자가 “도는 사람과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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