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7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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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행하면서 인간 세상과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
             遠人 不可以爲道].”라는 구절에서 시상을 가져와 첫 구를 시작하였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1792년 3월 정조는 안동 도산서원 맞은 편 분천汾
             川 모래사장 송림松林에서 영남선비들만 특별 등용하는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실시하고 합격자를 발표하자 3일 후 사간원 언관인 노론의 류성한柳星漢
             (1750∼1794)이 정조와 영남을 겨냥한 상소를 올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세력의 국정농단 하에서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
             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어린 눈으로 보고 자신의 등극도 극력 저지한 노

             론 집단의 위협적인 힘을 겪은 정조에게는 실로 예민한 뇌관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조정에 큰 파란을 몰고 온 것은 물론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조정을 넘어 전국적으로 문제가 확대되어 갔는

             데, 드디어 4월에는 영남 지역에서 10,000명이 넘는 선비들이 직접 연명

             한 만인소萬人疏 상소운동이 발발했다.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관
             련자의 죄를 묻고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이상
             정 선생의 조카인 이우李瑀(1739∼1811) 선생(이광정李光靖의 아들)이 소두疏頭가

             되었다. 이 상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조가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에

             직접 나와 대표자들과 소통을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을 때, 이헌유 선생
             은 홍문관 수찬 김한동金翰東(1740∼1811) 선생과 강세륜姜世綸(1761∼1842),

             김희택金熙澤, 이경유李敬儒(1750∼1821), 성언집成彦檝(1732∼1812), 김시찬金
             是瓚(1754∼1831) 등 소두를 포함한 주도적 인물 8인에 포함되어 목숨이 걸

             린 시간을 같이 한 인물이다. 노론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 당
             시에 이헌유 선생은 그해 1월부터 선혜청宣惠廳 낭관으로 재직하고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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