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9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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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카이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달마종의 개창자 노닌이 두 제자
를 송나라에 보내 임제종 양기파인 대혜종고의 법을 이은 졸암덕광으로부
터 인가받은 사실과 에칸의 계승자로서 도겐의 법맥을 이은 것은 동제洞濟
두 집안을 겸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기카이는 양쪽에서
받은 법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승사 문서』) 이는 조동종의 입장에서는 용
납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삼대상론은 이처럼 중국 선종의 원류에까지
소급되는 일이자 가풍의 문제이기도 했다. 후에 달마종의 색은 퇴색되지
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순선의 시
대를 연 달마종계와 조동종계가 합일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도겐선의 변질를 초래한 기카이의 개혁
그럼에도 여기에는 도겐의 사상을 견지하
려는 세력과 자파의 세속적인 발전을 원하는
세력 간의 대결이 있었다. 당시 영평사에 영
향력을 행사한 신도는 가나가와현의 호족인
하타 노시波多野氏였다. 무사로서 왕이 주재
하는 조정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
사진 4. 『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蔵随
호족은 당연히 후자를 원했다. 기카이에 대해 聞記』. 장원사長圓寺 소장.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적임자로 보았다.
영평사의 재정을 책임진 기카이는 당연히 세속과의 거래도 고려해야 했
다. 그가 본사에 돌아와서 생각한 것은 첫째는 산문, 별채, 불전 등 가람의
정비와 확충, 둘째는 토지신 등의 호법신 조영, 죽파풍경粥罷諷經, 즉 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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