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8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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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교의 탄압을 받아 피난을 가기도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도겐을 만나 법거량을 하는 중 건인사에 주석 중이던
도겐의 견처가 매우 뛰어남을 알고 2년 연하이지만 사사하기를 원했다. 이
후 가쿠안이 입멸하자 달마종의 문인들과 함께 도겐 문하에 들어왔다. 흥
성사의 수좌로서 도겐의 신변을 떠나지 않으며 가르침을 기록했다. 1236
년 39세 때, 흥성사에서 “일호중혈一毫衆穴을 꿰뚫는다.”는 도겐의 법어를
듣고 대오하여 인가받았다.(『전광록傳光録』).
영평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에는 도겐의 유풍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파와
도겐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법요 의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개혁파가
대립했다. 후자에는 달마종에서 온 승려들이 주류를 이뤘다. 에조는 이러
한 대립을 융합하고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도겐의 시자로서 그의 영
묘 옆에 거실을 마련, 생전에 모시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열반 뒤에
도 도겐의 시자 위치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고, 자신을 위한 사후 법요도 폐
하고 8일간의 도겐의 법요 중 하루를 자신을 위해 회향하도록 유언했다.
오직 한결같이 도겐의 분신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에조 때부터 발생한 양 파의 대립은 기카이
에 이르러 더욱 격화되었다. 그는 달마종의 3
조인 에칸懐鑑 문하에서 수학하고, 19세에 천
태종에서 수계했다. 1241년에 에칸과 함께
도겐에게 귀의했다. 영평사에서 전좌典座, 감
사監寺 직책을 맡았다. 도겐 사후에는 에조에
게 사사했다. 중국 답방을 한 후, 중국의 청규,
어록, 경록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를 통해
사진 3. 『 보경기宝慶記』. 동천사東川
寺 소장. 영평사의 의식과 규칙 등을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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