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8 - 고경 - 2024년 9월호 Vol.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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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에 사신을 보냈고, 이듬해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재위 562〜565)는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持節 東夷校尉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봉하였다.

            신라는 중국 남조의 양나라를 계승한 진陳(557〜589) 나라와도 사신과
          승려를 보내고 토산물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는데, 진나라

          에서도 불교의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주었다. 566년에는 기원사祇園寺,
          실제사實際寺와 황룡사를 완공하였으며, 574년에는 황룡사에 금으로 도

          금한 장육상丈六像을 조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아쇼카왕(Ashoka, 阿輸
          迦, 阿育王, 金剛智, BCE 273?〜BCE 232)이 오래전에 불상을 조성할 황철과 황

          금을 배에 실어 세상 밖으로 띄워 보냈는데, 이것이 여러 나라를 전전하
          다가 800년 후에 신라 땅에 도착하여 이것으로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같은 이야기다.
            576년에 진흥왕은 화랑花郞 제도를 공인하였고, 이 해에 수隋(581〜619)

          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운 안홍安弘 법사가 서역승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귀국하면서 『능가경楞伽經=稜伽經』, 『승만경勝鬘經』과 붓다

          의 사리를 가지고 왔다. 안홍 법사가 누구인지는 문헌상 확인하기 어려

          운데, 그의 증손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속사斷俗寺의 신행神行(704〜779) 선
          사라고 전한다. 신행 선사의 스승이 도당 유학승 법랑法朗(?〜?) 선사라고
          하는 바에 의하면, 안홍 법사는 법랑 선사의 선배가 되는 셈이다. 아무

          튼 진흥왕은 불교에 독실하였고, 말년에는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

          이라고 하였다. 왕비도 이를 따라 비구니가 되어 법흥왕 때 지은 신라 최
          초의 니승 사찰인 영흥사永興寺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진흥왕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서울의 북한산 비봉碑峰과 함흥
          의 황초령黃草嶺에 세워진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를 찾아 이를 고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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