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2 - 고경 - 2024년 9월호 Vol.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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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속리산으로 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곳

          은 지난날 그가 절을 지을 터를 찾으려고 금산수에서 속리산에 갔을 때
          보아 둔 곳이었다. 영심 화상은 바로 이곳에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고 입

          적할 때까지 속리산에 주석하면서 점찰법회를 이어 갔다. 그의 법은 헌
          덕왕憲德王(재위 809〜825)의 아들인 심지心地(?〜?) 화상에게 전해졌다. 법

          주사라는 이름은 그 후 창건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이 길상사가 개명된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는 산의 이름에서 따 속리사俗離寺로 주로 불렸는데, 조선시
          대 말까지 이 절은 법주사와 속리사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린 것 같다. 세

          종 때 전국 사찰을 선교양종으로 나누어 혁파할 때 속리사는 교종 사찰
          로 분류되어 지원을 받았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

          地志』(1656)와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에서
          속리산의 서쪽에 속리사가 있고 남쪽에 법주사가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

          면, 이 당시에는 지금의 법주사와는 따로 속리사라고 불린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복천암은 그 당시에는 복천사福泉寺라고 불렸다.

            심지 화상은 영심 화상에게서 간자를 전해 받고 이를 던져 간자를 봉

          안할 자리를 점을 쳐본 결과, 지금의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 심지 화상은 이곳에 동화사를 창건하였다.
          이로써 진표 율사의 법맥은 영심 화상을 거쳐 심지 화상에게로 이어졌

          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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