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6 - 고경 - 2024년 9월호 Vol.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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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계를 받았다. 헌안왕 2년(858)에 입

          당하여 앙산혜적仰山慧寂(807~883)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하자, 앙산은

          “온 것이 어찌 이리 늦었으며, 인연
          이 어찌 그리 늦었는가? 뜻한 바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머물러라.”라
          고 허락하였다. 거기에서 순지는 앙

          산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현현한 종지
          를 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안회가

          공자 곁에 있는 것 같고, 가섭이 부                사진 2. 앙산혜적 선사.
          처님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한다.

            순지가 귀국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874년경에 송악군松岳君
          의 여자 단월인 원창元昌 왕후와 그의 아들인 위무대왕威武大王이 오관산

          용암사龍巖寺를 희사하여 거기에 머물렀는데, 이후에 서운사瑞雲寺로 개칭
          하였다. 65세에 입적하였는데, 호는 요오 了悟이며, 탑호는 진원眞原이라고

          한다. 김두진은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순지가 874년경에 신라에 귀

                                                                      2)
          국하여 약 20년 활동하고서 894년경에 열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앙종에 있어서 순지의 위상




            위앙종의 종풍은 ‘방원묵계方圓黙契 체용쌍창體用雙彰’으로 알려져 있
          다. 선禪을 가르치거나 배우거나 학인을 제접할 때 기용機用이 원융하며




          2)   김두진, 「요오선사 순지의 선사상-그의 삼편성불론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65집, 1975,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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