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고경 - 2024년 9월호 Vol.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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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아직도 여러 유형의 허무와 염세 및 신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의 빈약함에 있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라면, 불교는 결국 삶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염세와 허무주의가 아니냐?>라는 의문은 타당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불교에 대한 시선이 결정된다.

            행(saṅkhārā)에 대한 이해는, 열반의 문은 물론이거니와 붓다의 길에서
          만나는 겹겹의 여러 관문을 통과해 가기 위해 언제나 챙겨야 하는 열쇠

          에 해당한다. <니까야는 이해하기 쉬워 좋다>라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필자에게는 두꺼운 관문들이 줄지어 버티고 서 있어 그 오의奧義를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원형 보전寶典이다. 가급적 자신의 이해를 현재어에 담
          아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을 글쓰기의 원칙으로 삼고는 있지만, 행

          과 관련하여 앞으로 이어질 글들은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 오온五蘊에서의 현상’인 행의 의미에 접근하려면, 붓다가 12

          연기에서 말하는 <‘무명–행–식’의 연기적 발생과 소멸>에 관한 설법의
          의미를 성찰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12연기 전체에 대한 견해는 별도의 글

          로 다루어 보겠지만, 우선 ‘무명–행–식’ 연기의 의미만이라도 유심히 성

          찰해야 한다. 게다가 ‘무명–행–식’의 상호 연관과 그 의미는, 사성제·팔
          정도에 망라된 붓다 법설의 모든 관문을 여는 핵심 열쇠가 된다. 글이 길
          어질 수밖에 없고, 쉽게 읽히지 않는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미리 양해

          를 구한다. 가급적 필자의 소견을 분명히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 주요 저서로
            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
            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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