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고경 - 2024년 9월호 Vol.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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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양으로 도를 구하려는 태
도를 상징한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절이든 오래 하고 많이 하면 되지 않
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오래·자주·
많이’는 수행의 힘을 키우는 유효한
전략이다. 습관이라는 얼음을 녹이
는데 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런데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있다. 본
질을 제대로 보는 하나의 자리를 확
보하는 일이 그것이다. 성철스님은
사진 5. 손오공과 나타태자.
이것을 ‘신주를 모신 제사’라고 불렀
다. 이렇게 오로지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 하나를 갖추어 무소의 뿔처
럼 나갈 수 있게 된 입장이라면 수행에 있어서의 ‘오래·자주·많이’는 제
대로 된 해결책이 된다. 그러나 나타태자의 경우처럼 많은 것만을 능사
로 삼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눈을 가리는 장애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아상이 붙기 때문이다. 바로
그 새로운 자아상이 나타태자의 뒤통수를 친 장본인이 된다.
결국 거령신의 궁극의 큰 하나와 나타태자의 무수한 많음은 각기 한
쪽으로 치우쳐 중도를 벗어나 있다.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해결의
핵심은 하나와 많음의 통일적 이해에 있지만 그 자리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기까지 많은 사연이 기다리고 있다.
강경구 동의대학교 명예교수, 퇴직 후에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라는 생각으로 성철선의 연구와 문학
의 불교적 해석에 임하고 있으며, 그만큼의 시간을 참선과 기도에 쓰면서 지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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