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1 - 선림고경총서 - 21 - 태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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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장 221


            이 마음에 흘러들자 왕은 기쁜 얼굴로 “경룡사(敬龍寺)에 머무르
            십시오”하므로 스님은 명을 따랐다.

               현릉은 “장하다.미원장의 아전은 스승의 귀하심을 알아보고
            공경히 받들었구나”하고,그 장(莊)을 현(縣)으로 고치고 어진 이
            에게 명령하여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때 서울의 남녀들은 스님의 법음을 들으려고 모두 달려와 예
            배하였고,스님은 거기서 한여름을 머무르셨다.스님은 나라에 변
            란(變亂)이 있을 줄 알고 경룡사를 떠나 소설산에 들어가셨는데,

            과연 얼마 뒤에 일신(日新)의 변란이 일어났다.
               병신년(1356)2월에 왕은 문하평리 한가귀(門下評理 韓可貴)를
            보내 스님을 청하였으나 스님의 뜻은 더욱 굳었다.다시 판전교

            이정(判典校 李挺)을 보내 청하였으므로 스님은 구름의 자취를 숨
            기지 않으셨다.그리하여 3월 6일에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온갖

            보배로 사자좌를 장엄하고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개
            당하니 선․교의 스님네들이 모두 모였다.
               현릉은 태후(太后)를 모시고 권속을 거느리고 친히 왕림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와 금실로 수놓은 좌구[金縷尼師壇]․수정염주
            (水精念珠)․침향불자(沈香拂子)및 그밖의 온갖 옷과 도구 등을

            바쳤다.스님은 사자좌에 올라가 크게 사자후를 여셨다.왕은 손
            수 보시하셨다.이보다 먼저 이 소문이 천자에게까지 들어가 여러
            가지 빛깔의 단필(段匹)가사 3백 벌을 내리셨는데,이 날 스님네

            [福田]에게 나누어주니 법회는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현릉이 금자(金字)대장경을 원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마음을
            돕기 위하여 왕에게서 받은 금을 개인 재산으로 쌓아 두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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