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선림고경총서 - 27 - 운와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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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가르침을 집대성해 주기를 기다린 것이다.그러나 너무 심했
               다.성인(공자)이 노․위․진․송(魯․衛․陳․宋)에서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구이(九夷:東夷)에 살고자 하여 뗏목을 타고 저
               바다로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그 당시 국외 수만 리 밖의 가

               르침을 중국에 전하려고 한들 천자 제후 그 누가 들어주겠는가?
               불법을 구차히 전하지 않았음은 불법의 감응을 멀리서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빠른 감응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서였다.’


               이는 모두 조수스님이 서울[京師]에서 쓴 글이다.고금을 놀라

            게 하는 그의 글은 수만 마디가 넘으나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또
            한 조수스님은 소동파의 초상화에 찬을 쓴 적이 있다.



                 한(漢)나라의 사마천(司馬遷)양진(楊震)왕일(王逸),
                 당(唐)나라의 이태백(李太白)진자앙(陳子昴)
                 이 다섯 분도 모두 촉 땅에서 태어났지만
                 선생처럼 빛나는 기개는 없었다

                 선생의 시와 겨룰 수 있는 자는 오직 자미(杜子美:杜甫)이며

                 선생의 문장과 함께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장(司馬子長)이라
                 부(賦)또한 굴원(屈原)가의(賈誼)보다 훌륭하고
                 글씨는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보다 힘차니
                 이러한 선생의 뛰어난 솜씨는
                 아마도 지극한 도의 쭉정이리라
                 선생의 도는 후직(后稷),이윤(伊尹)과 같으니

                 자기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참소로써 형벌을 내렸던 그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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