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선림고경총서 - 29 - 산암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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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암잡록 上 109


            일찍이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았다.그러나 달갑게 생각하지 않다
            가 관직을 버리고 출가하여 상우(上虞)봉국사(奉國寺)에서 잡일을

            하다가 출가 삭발하였다.그의 스승이 그에게  심경(心經) 을 외
            우도록 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기억하지 못하자 그
            를 몹시 미워하였다.어느 날 선 묘봉(之善妙峰)스님이 그 절을 지

            나는 길에 그의 스승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글자를 모르고 오로지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것만 좋
            아하니 아마 선정(禪定)을 닦던 사람이 다시 태어난 성싶다.이 사

            람을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
               스승은 그를 따라가도록 흔쾌히 허락하였다.
               처음 설두사(雪竇寺)에 이르러 방부를 들이고 부지런히 참구하

            며 누워 자는 일이 없었는데,어느 날 갑자기 마른나무처럼 꼿꼿
            하게 선정에 들어 있었다.그의 옆에 정(正)수좌가 계속해서 그의

            동정을 살폈는데 7일이 지나서야 서서히 선정에서 풀려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양 깊은 밤에 회랑(回廊)처마 밑을 천천히 오가는
            것이었다.이에 정수좌가 “큰 일을 마쳤으니 기쁘겠소!”하였으나

            역수좌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보이는 종루를 가리키며 입에 나
            오는 대로 게송을 읊었다.

               또다시 정수좌의 말에 따라 첫 새벽에 지팡이를 흔들면서 길을
            재촉하여 이틀 후에 화정산(華頂山)에 닿았는데,계서(溪西)화상을
            뵈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벌써 산문이 닫힌 뒤였다.산문 밖에

            서 잠을 자고 이른 새벽 산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계서화상을
            뵈었는데 서로 문답하며 시험하는 동안 종지를 깨치고 향로대를
            걷어차고는 곧장 그곳을 떠났다.계서화상이 불렀으나 아무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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