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선림고경총서 - 35 - 벽암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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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관계가 없다.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벌써 울리고 물시계의 물
도 이미 다 떨어졌는데 장차 무엇을 하려는고?아아!영양(羚羊)이 뿔을
나뭇가지에 감추어 두니 그를 뒤쫓던 사냥개는 자취를 찾을 길 없구나.
그러나 유하혜(柳下惠)처럼 성인의 길을 배우는 자라면 어찌 옛사람
의 발자취를 따르고 쫓지 않으리오?바로 이렇게 이해한다면 원오스님과
대혜스님 두 어른들이 모두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오스님은 뒷날의 자손을 걱정하는 마음이 많아서 설두스님의 송고
(頌古)를 거량해 주셨고,대혜스님은 (자손들이)불에 탈까 물에 빠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벽암집 그대로 불 속에 집어넣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일대장교를 모두 말씀하시고 나서 맨 나중에 “나는 전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셨다.이것이 어찌 우리를 속이느라 하신 말
씀이겠는가?원오스님의 심정은 부처님께서 경전을 설하시던 마음과 똑
같고,대혜스님의 심정은 부처님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 것과
똑같다.우(禹)․직(稷)․안자(顔子)가 한 일은 서로 다르지만 견지를 바
꾸어 보면 모두 동일하다.밀건 당기건 의도는 차를 가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뒤 2백여 년이 지나서 우중 땅에 사는 장명원거사가 목판을 새겨
길이 전하였으니,참으로 이것은 조사의 가르침이 회춘을 맞는 게 아니
겠으며,세상의 운세가 그렇게 정해졌던 것이 아니겠는가?그러니 이 책
이 세상에 유포되는 데에는 그 유서가 매우 깊다 하겠다.그러나 만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