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선림고경총서 - 37 - 벽암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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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운문스님은 80여 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는데,입적한 뒤 70
여 년이 지나 부도를 열고 살펴보니,엄연히 예전의 살아 있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그의 견지(見地)는 명백하고 솜씨[機]와
경계[境]는 신속하여,모든 설명해 주는 말[垂語],다른 측면에
서 하는 말[別語],대신해서 대답하는 말[代語]이 참으로 고준
(孤峻)하였다.
이 공안은 번뜩이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참으로 신출귀몰하다
하겠다.경장주(慶藏主)는 이에 대해서 “일대장교(一大藏敎)에도
이 같은 말씀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흔히 알음알이[情解]로 살림살이를 하면서
“부처님은 삼계(三界)의 길잡이이시며,사생(四生)의 자비로운
어버이이시다.이미 옛 부처[古佛]이신데 무엇 때문에 노주(露
柱)와 서로 사귀는가?”라고들 한다.이처럼 이해해서는 (운문스
님의 말뜻을)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이를 “무(無)속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나,종
사의 말씀은 의식(意識)이 없고 정량(情量)도 없으며,생사(生死)
가 없으며,법진(法塵)이 없으며,참된 진리[正位]에 들어가 다
시는 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
다.그대들이 말로써 이러쿵저러쿵한다면 바로 손발을 얽어매
는 격이다.말해 보라,운문스님의 뜻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다만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다면[一如]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이 그를 흔들려 해도 흔들 수 없을 것이다.그러한 그는
‘유(有)’를 말해도 옳고 ‘무(無)’를 말해도 옳으며,솜씨[機]가 있
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여기에 이르면 박자박자마다 조사의 법
령이다.
오조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상당한 운문스님도 원래 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