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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5견이라 한다는 설명을 하자면 다시 그 각각의 내용을 설명해야 하

            고, 나아가 본혹本惑과 수혹隨惑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선문에서 교학
            을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가지와 잎사귀를 하나하나 설하고

            이에 따라 학습하다 보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불이의 도리에 눈뜨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②의 생략된 뒷 부분, 즉 ‘네 가지의 거센 흐름을 벗어나 있으므로
            안전한 삼각주라 부른다(離四瀑水, 故名爲洲)’는 구절 역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략되었다. 네 가지의 거센 흐름은 욕망의 거센 흐름
            (欲暴流), 존재성의 거센 흐름(有暴流), 견해의 거센 흐름(見暴流), 무명의

            거센 흐름(無明暴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무명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을
            설명하다 보면 각각의 번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번뇌의 전체 지형을

            보여주어야 한다. 설법 목적을 벗어나 번뇌에 대한 교학적 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더구나 성철스님은 모든 번뇌망상을 3세로 요약하고, 그

            것을 다시 근본무명으로 귀납하여 수행의 과제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입장이다. 생략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③과 같이 ‘중생들을 조어하므로 귀의라 부른다(調衆生故, 故名歸依)’를
            생략하였다. 원래 여기에 나열되는 대열반의 다양한 이름들은 모두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구경무심을 가리키는 용어들이다. 그래서 성철스
            님 역시 이것들은 “제8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영단하고 구경대무심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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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달한 심심현경을 표현한 명칭” 으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엄밀히 말
            하자면 중생을 조어하는 일 역시 내면의 번뇌를 내려놓는 일이고, 귀의

            역시 둘 아닌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역시 구경무심의 범주에 귀
            속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귀의=열반’




             119   퇴옹성철(2015),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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